2013. 2. 17.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골20)
본문 : 골 3:12-14
제목 : 성도가 입어야 할 옷.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
오늘날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외형적인 것 환경적인 것에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것들을 먹으면서 사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학교를 졸업했느냐 어떤 자격증을 가졌느냐 어떤 직장에서 일하느냐 이런 것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얼마나 잘생기고 얼마나 날씬하고 얼마나 멋진 몸매를 가졌는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런 외형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속사람이 어떤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외부환경이 어떤 조건을 가지고 사느냐가 아니고 거기에 살고 있는 인간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그 사람의 영혼이 어떤 상태인가가 정말로 중요합니다.
아무리 외형적으로 좋은 조건을 가졌다고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이 악하면 그 좋은 조건들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 아무리 좋은 마음씨를 가졌다고 해도 그 사람의 영혼이 거듭나지 않았으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요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먼저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거듭난 영혼을 가진 자답게 거듭난 사람이 가져야 할 아름다운 덕목들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다가 세상의 지식들을 쌓고 외형적인 조건들을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참된 인생을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를 바로 알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런 말씀입니다.
거듭난 성도들이 가져야 할 바른 덕목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성도로서 벗어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고 이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도인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성도의 신분
본문 12절 상반절 말씀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이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신분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에는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에는 우리 성도들이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1절 말씀에는 더 구체적으로 우리 성도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랑받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씀 중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씀이 이 선택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해주셨다는 말씀처럼 좋은 말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사는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아무렇게나 살도록 내버려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특별히 우리를 특별히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고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 선택이라는 말에 별로 감동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렇게 선택해주시지 않아도 나 스스로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경쟁을 시키지 않고 하나님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은근히 화를 낼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에베소서 1장의 말씀대로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선택을 하시고 예정을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해 주셨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셨는데도 그 말씀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은 사람을 바르게 살지도 못하는 사람을 선한 일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을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런 특혜를 주시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정정당당하게 각 사람이 행한 행위대로 구원을 받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고 그래야 정정당당한 것이지 그렇게 하나님 마음대로 하나님이 원한다고 별 볼일이 없는 사람을 아주 나쁜 짓이나 하고 사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니까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법을 정하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겠지만 저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해 주셨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너무나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족한 우리를 선택해 주신 것은 그 은혜에 감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거룩한 자들입니다.
성도라는 말이 거룩한 무리들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성도들 즉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교회당이 크고 아름답다고 그것을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여기 이렇게 모인 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모임들이 많이 있습니다.
동창회도 있고 향우회도 있고 팬클럽도 있고 동호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임들은 별게 아닙니다.
그냥 같이 학교 다니고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고 같은 취미를 가지고 서로 같다는 이유로 모여서 함께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임은 거룩한 모임입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아주 특별한 일로 아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영원한 운명을 같이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을 한 사람만 모이는 거룩한 모임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사람들만 모이는 거룩한 모임입니다.
죄가 하나도 없이 깨끗하게 된 사람들만 모이는 거룩한 모임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만 모이는 거룩한 모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만 모이는 거룩한 모임입니다.
이 거룩한 모임이 교회요 우리가 그 거룩한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성도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무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사랑을 받기만 하려고 하면 되나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은근히 잘못된 노래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사랑을 받기만 하려고 하면 누가 사랑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미 배운 사랑을 주제로 한 요한일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0-11)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서로 사랑을 하면서 사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특별한 신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임을 늘 기억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거룩한 무리로 따로 불러서 교회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나라에서 살게 해 주신 거룩한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성도가 입어야 할 옷
우리 성도들이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되었으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특별한 삶을 살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옷을 입는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고 그렇게 옷을 입어야 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옷 입듯이 입어야 한다는 것은 늘 그렇게 당연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옷을 입지 않고는 살수 없듯이 우리 성도들은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옷을 입으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낼 때 무슨 옷을 입었느냐를 보는 것처럼 우리가 이런 행동을 함으로서 우리의 신분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옷을 입으라고 표현을 한 것은 우리의 변화된 신분을 보여주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마땅히 입어야 할 옷은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입니다.
12절 말씀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했습니다.
긍휼과 자비는 비슷한 말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동정의 여지가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지만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동정의 여지도 없는 사람까지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에 대해서도 불쌍히 여기는 것이 긍휼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선함과 인자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악한 사람에게 악으로 대하지 않고 선하게 대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을 자비라고 합니다.
긍휼은 마음속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고 하면 자비란 그 긍휼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악한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이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나쁜 짓이라고 해도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과 자비를 가진 사람은 당연히 온유와 겸손이 그의 삶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온유라는 말은 우리말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반대말은 각박한 마음일 것입니다.
차갑고 딱딱한 마음이 온유와 반대되는 마음입니다.
가끔 차를 몰고 서울에 가보면 참 각박한 세상이다 하는 것을 느낍니다.
어떻게들 빡빡하게 사는지 양보라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자기는 양보하지 않으면서 끼어들기는 기가 막히게 남의 앞에 끼어듭니다.
서울 아무나 사는 곳이 아니구나, 아차 했다가는 큰일 나는 세상이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겸손이라는 말은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온유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 난 사람은 남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습니다.
원리원칙대로 하고 잘못하면 사정없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오래 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래 참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문화 하면 빨리빨리 문화라고 합니다.
외국 사람들이 가장 빨리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 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조금만 참으면 세상이 평화를 이룰 텐데 그 참지 못하는 습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참을 인자가 셋만 모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는데 못 참습니다.
며칠 전 조선일보에 “분노 사회 앵그리 코리아”이라는 제목으로 참지 못하는 대한민국에 대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아파트 위층에서 너무 시끄럽게 한다고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 올라가서 위층 사람을 죽여버렸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밥을 왜 그렇게 쩝쩝대며 먹느냐고 하자 그 어머니를 목 졸라서 죽였다고 합니다.
어떤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못생겼다고 하자 역시 그 여자를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우리의 뇌에는 사물을 판단하는 전두엽이라는 기관이 있는데 이 기능이 마비가 되어서 순간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마음이 쌓이고 참지 못하는 성질이 쌓이게 되면 이 전두엽의 판단 기능이 마비되어서 충동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참는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배가 고파도 참고 힘들어도 참고 놀고 싶어도 참고 화가 날 일이 있어도 참고 참는 것을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오늘날의 아이들 문제는 참는 것을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떼만 쓰면 다 해줍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도 참지를 못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다 해주니까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었지만 어른이 되면 누가 그렇게 해 줍니까 해줄 사람도 없고 해 줄 수도 없습니다.
참을성이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주요 멤버가 되면 어떻게 될까 참 걱정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해 주고 싶어도 없어서 잘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부자 집 돈 많은 부모님들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서 키웁니다.
돈 달라면 돈 주고 뭐 갖고 싶다면 다 사주고 유학도 보내주고 여행도 시켜주고 하고 싶은 것 다하면서 살게 해 줍니다.
그렇게 키우면 효자도 되고 좋은 일 많이 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 것 같아서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타락하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 술에 여자에 도박에 엉망진창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어렵게 키운 아이들이 효자도 되고 애국자도 되고 선한 일 좋은 일도 많이 하고 특별히 신앙생활도 잘합니다.
아이들에게 잘해주지 못했다고 가슴 아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큰 재산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마땅히 입어야 할 옷은 서로 용납하고 용서할 것입니다.
13절 말씀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했습니다.
용납이라는 말은 누가 불평을 할 때 그것을 받아들여 준다는 뜻입니다.
불평불만을 말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그 불평불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변명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도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살펴보면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꼭 그 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살펴보면 그 사람이 불평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잘못들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불평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겸손한 자세이고 온유한 마음을 가진 자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용납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잘못까지 용서해버리는 것입니다.
속으로 용납은 하고 너는 어디 잘 하나보자 하고 꿍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까지 다 용서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용서하는 행위가 긍휼과 자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오히려 선을 베푸는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를 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도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용서했나를 살펴보면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너무 커서 도저히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고 그 책임을 조금도 묻지 않으시고 깨끗하게 은혜로 거저 용서해 주셨습니다.
성도가 마땅히 입어야 할 옷은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에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라고 했습니다.
앞서서 말씀한 여러 가지 덕목들이 참 중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사랑이 없으면 의미가 작아집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그 모든 것이 빛을 발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긍휼이나 자비나 온유나 겸손이나 오래 참음이나 또 용납이나 용서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해질 때 온전한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런 것들이 온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덕목들의 중심 사상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긍휼과 자비를 베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래참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용납하고 용서할 때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고 거룩한 무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바른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긍휼과 자비와 온유와 겸손과 오래 참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피차 용납하고 용서하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