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8.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57)
본문 : 마 7:13-14
제목 : 부활과 영생의 좁은 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오늘 본문 말씀에 두 개의 문이 있음을 봅니다.
한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고 또 한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했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문도 크고 그 길도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문도 좁고 그리로 인도하는 길도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했습니다.
여기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부활과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그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할 문입니다.
그 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엄청난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오늘 본문 말씀만 가지고 생각을 해도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도 좁고 그 길도 협착하여서 찾는 사람도 없는 길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또 바로 앞의 산상보훈의 말씀들과 연관해서 생각을 해 보면 이 길이 참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통해서 말씀을 해 주신 그런 마음으로 그런 행동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부활과 영생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영원하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 문이 그렇게 좁고 그 길이 그렇게 험하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말씀이고 힘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1.율법을 행함으로 들어가기는 불가능한 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모르고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를 때는 당연히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을 따라서 영원히 멸망하는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가 잘난 척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그들을 위해서 예비 된 영원한 지옥 영원한 파멸의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돈을 가지고 권세를 누리면서 마음껏 누리고 살면서 하나님을 욕하고 우리들을 비웃고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살겠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문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알고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우리가 성경을 아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우리가 저들을 부러워하고 저들처럼 살다가 저들이 가는 길로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저들처럼 살지 말고 저들을 부러워하지도 말고 부활의 문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활과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은 의로운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그 말씀을 실천하여야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것도 한두 가지 지키거나 겉으로 지키는 척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말씀을 아주 철두철미하게 사람이 보는데서가 아니라 사람이 평가하는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평가 기준에 의해서 철저하게 지켜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그길로 가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산상보훈의 말씀을 대하면서 이 가르침대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통하여 하신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율법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가를 자세히 확실하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유대인들 즉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고 그래서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계명에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꼭 살인을 저지르지 말라는 말로 이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어, 그래서 나는 그 계명에 대해서 의인이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계명의 의미를 바르게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 욕을 하는 사람,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다 살인죄를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이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이기 때문에 미워하는 모든 것들이 살인죄와 같은 죄가 된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간음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죄도 꼭 간음을 해야 죄가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자를 쳐다보고 엉큼한 마음만 품어도 간음죄와 같은 죄가 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른 눈이 실족케 하면 오른 눈을 빼어버려야 하고 오른 손이 실족케 하면 찍어버려야 됩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대야 하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도 벗어주어야 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삶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좁은 길을 가는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선하게 살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처럼 사랑하고 산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악합니다.
너무나 무책임하게 살고 있습니다.
선한 사람도 있지만 악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 틈만 있으면 우리를 속이고 우리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 우리를 짓밟고 올라서려는 사람, 별별 사람들이 많은 세상인데 어떻게 우리만 그렇게 순하게 너그럽게 속으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남의 건물에 들어 와서 담배피우고 꽁초 버리고 침을 뱉고 가는 사람 그럴까봐 화장실 문도 안 잠그는데 복도에 계단에 실례하고 가는 사람 별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3장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자신이 죄인이라고 깨닫는 자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율법을 지킴으로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재해석하신 율법들을 온전히 다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일 좀 하고 선하게 좀 살고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낫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나는 그 부활과 영생
의 문을 들어 갈 수 있다는 착각을 하는 사람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2.믿음으로 들어가기도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사실을 로마서를 통해서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갈 수 있는 그 길과 진리와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곧 그 문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고 그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이 내 죄를 대신 하신 것임을 믿을 때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라는 것을 믿을 때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고 그 생명의 문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참 쉽다. 그 문을 들어가는 것이 참 쉽다. 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구원을 받은 우리 편에서 생각하면 참 쉽습니다.
우리의 행함과는 관계가 없이 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받으면 되고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믿는 것도 어렵습니다.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쉽게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거짓말이고 모든 것이 속이는 것이고 모든 것이 가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까마득하게 옛날의 일을 지금 믿으라고 하면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우리가 전도를 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습니까?
수시로 무시로 사람들에게 전도합니다.
가족에게도 하고 친척이나 친구들에게도 합니다.
한 두 번 합니까? 지겹도록 듣기 싫어하도록 틈만 있으면 전도합니다.
그런데 전도하면 사람들이 믿어주나요?
오히려 우리를 비웃고 불쌍한 눈으로 봅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님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서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그 속에 들어가셔서 역사하셔야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마음에 성령님이 오시지 않아서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교회에 오지도 못합니다.
성령님만 마음에 모시면 신앙도 고백할 수 있고 믿음생활도 잘 할 수 있고 이 세상의 삶도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성령님이 그 속에 오시지 않기 때문에 진리도 모르고 믿지도 못하고 바르게 살지도 못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된다고 하니까 성령을 받으려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다고 성령님께서 오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오시라고 해서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대로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에게만 오시기 때문에 누구나 초청을 할 수도 없고 초청한다고 오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셔서 믿음을 고백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사람들을 미리 다 선택을 해 두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창세전에 미리 선택을 해 두셨습니다.
어떤 기준인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을 하셨습니다.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참 억울하고 불공평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을 하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노력을 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나도 좀 선택을 해 주셔요, 나도 좀 해 주세요. 라고 데모를 할까봐 사람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그 작업을 끝내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 안에 들어간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반만년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 반만년 즉 5천여 년의 역사 속에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겨우 가까운 근래의 100여년의 역사 속에 태어난 사람들만 복음을 들었고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소수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많지만 초창기에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예수님을 믿었고 또 이제 자꾸 그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 보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도 참으로 어렵고 힘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는데 참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아직도 율법을 행하여야 구원을 받는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되나 행함이 있어야지 라고 하면서 믿음보다 행위에 더 비중을 두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믿음에는 행위가 뒤따라야 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 바르게 선하게 잘 살면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 때문에 믿음이라는 것을 우습게 알고 바른 믿음의 고백이 없이 착하게만 살려고 하면 그것은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신칭의의 진리, 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이 참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성령님께서 들어 가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고백을 잘 안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막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택함을 받았으면 성령님을 받았을 것이고 믿음을 고백하면 누구든지 그 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렇게 오랜 세월 교회에 다녀도 말씀을 잘 듣지 않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도 않고 바르게 믿음생활 하지 못하면 택함을 받지 못했거나 그래서 성령님이 그 속에 계시지 않은 가라지 교인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믿어지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십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그 사랑과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항복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이 좁은 관문을 통과하신 정말 위대하신 분들입니다.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에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기쁨과 행복을 주는 영광의 문입니다.
사람들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합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길도 넓고 좋기 때문입니다.
짧은 인생 뭐 그렇게 복잡하게 삽니까?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살아도 짧은 세상인데 마음껏 즐기면서 살자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대로 사는 것이 즐겁습니까?
허랑방탕하게 먹고 마시고 자기 마음대로 산다고 행복합니까?
술을 마실 줄 모르는 사람들은 가끔 술 한 잔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좀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아 되게 기분 좋은 것 같네 나도 한번쯤 저렇게 취해볼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한번 해 보세요 별 것 없습니다.
돈 없어지고 위장 상하고 쓸데없는 실수해서 망신당하고 더 심하면 죄도 짓게 되고 더 심하면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서 인생을 망치는 것이 그 짓입니다.
어디 우리 인생을 망치는 것이 술뿐입니까?
욕망을 채우기 위한 잘못된 이성 관계, 오락, 도박, 마약, 별별 것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부자가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웃고 즐기는 자가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칠게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자기 위주로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먹고 잘 살고 마음껏 누리고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넓은 길의 끝에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인생의 종점에는 죽음과 심판과 지옥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지금은 비록 힘이 드는 것 같고 사람들이 즐겨 찾는 길은 아닐지라도 이 길의 끝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보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웃고 즐기는 자보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거칠게 사는 자보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고 만족하게 잘 사는 사람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이 길을 가는 것이 힘이 들 것 같고 어려운 인생길을 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다라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지만 사실 그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했습니다.
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보면 참 행복합니다.
즐겁고 기쁩니다.
힘들어도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더 힘이 나고 더 지혜롭게 더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넓은 대로를 마음껏 다니다가 좁은 오솔길을 걸으면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번 걸어 보세요.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들도 볼 수 있고 아름다운 새소리들도 들을 수 있고 맑은 물 신선한 공기가 참 좋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육신적인 면이나 영적인 면에 있어서 좁고 험한 오솔길은 우리를 강건하게 해 줍니다.
이 길을 다 가고 난 후에 우리가 받게 될 상급을 생각하면 자다가 일어나도 기쁘고 고생스러운 일이 있어도 오히려 즐겁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길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살아가다가 보면 넓은 길로 가다가도 좁은 길로 가게 될 것이고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운전을 해 보면 운전이 능숙한 사람은 차선을 미리 바꾸지 않습니다.
막히지 않은 넓은 차선을 달리다가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해야 될 때 밖으로 나올 때 그 때 바로 앞에서 추월을 해서 차선을 바꿉니다.
저는 미리 차선을 바꿉니다.
좀 늦더라도 그것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바로 앞에서 끼어들기를 할 때 사람들이 양보를 해 주지 않으면 사고가 나기 때문에 좀 늦게 가더라도 미리 미리 차선을 바꿉니다.
인생을 사는 것도 비슷해 보입니다.
인생 편하게 살다가 죽을 때가 다 되면 얼른 차선을 바꿔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있어서는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이나 넓은 문으로 가는 길이나 같은 방향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같은 방향이니까 넓은 길로 가다가 어느 날 마음이 바뀌면 좁은 길로 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넓은 길로 가다가 문을 들어서려고 할 때 얼른 좁은 문으로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은 반대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넓은 길로 가면 좁은 문과는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따라 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점점 멀어지고 돌이키기에 힘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돌아서야 합니다. 지금 좁은 길에 들어서 있어야 합니다.
좁은 문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시려면 지금 결단을 해야 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절대로 바꿔서 갈 수 없는 길이 이 길입니다.
그래서 좁은 길 좁은 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문이 있습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 넓은 문이 있습니다.
쉬워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히히덕거리며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 있는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영원한 고통의 길로 인도하는 지옥의 문입니다.
또 한 길은 좁고 험한 길입니다.
사람들이 가기를 싫어하는 길 힘들고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길입니다.
그러나 와 보시면 어렵지 않습니다.
이 길의 끝에는 좁지만 생명의 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기다리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있는 문입니다.
좁은 이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부활과 영생이 있는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