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4.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41)
본문 : 마 6:14-15
제목 :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보면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굉장히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세상을 삽니다.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 줄을 확실히 볼 줄 알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개혁을 하고 그래서 바른 세상이 되게 하려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눈을 가지고 잘못을 보기 보다는 잘한 것에 대해서 칭찬을 할 줄 알고 잘 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까?
물론 내가 잘못된 길로 갈 때 그것을 지적해 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알 수 있고 잘못된 것을 고칠 수도 있고 해서 참 유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막상 그런 비판적인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참 피곤합니다.
그 사람이 우리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다 알고 바르게 지적을 해 주고 지도를 해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가 배우고 자기가 경험한 것에 의해서만 말을 할 수 있고 그 사람의 판단이 언제나 정확한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잘 못된 정보를 가지고 지적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혼란스럽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고집스럽게 자기주장만 내세우기 때문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단체나 교회에 그런 비판적인 사람이 있으면 참 일하기가 불편합니다.
그런 사람이 없으면 좀 잘 못된 일이 있어도 서로 이해하면 됩니다.
일이 잘 못되어서 조금 돌아가기도 하고 모양새가 좀 좋지 않아도 결국은 잘될 수 있는데 중간에 잘 됐니 못됐니 하고 시비를 하면 모든 사람이 피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이해력이 많고 격려를 해 줄줄 알고 좋은 점을 칭찬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일이 참 재미가 있고 좋습니다.
비록 일의 능률은 좀 떨어질 수도 있고 실적은 저조할 수 있어도 함께 마음을 합하여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면서 사는 것이 엄청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서로 비판하면서 살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이해하고 설로 격려하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은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면서 발전을 해 간다고 할지라도 주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끼리는 비판이 아니라 격려가 있기를 바라고 공의보다는 사랑이 넘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런 내용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실 것이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시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기 보다는 이해하고 용서해 줄줄 아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
본문 14절 말씀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잘 살펴보고 이해를 잘 하셔야 합니다.
흔히 할 수 있는 오해는 이 말씀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죄의 용서로 오해를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용서를 받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다 용서하지 않은 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거나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다시 빼앗긴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마치 다른 사람의 용서가 구원의 조건처럼 생각을 하고 구원의 확신을 빼앗아버리기도 합니다.
또 여기 ‘잘못’을 ‘죄’와 같은 단어로 생각을 해서 죄 사함의 근거가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면 우리의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 먼저 ‘잘못’이라는 단어데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옛날 성경에는 ‘과실’이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지금 우리 성경에는 ‘잘못’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죄라는 단어는 주로 하마르티아(ἁμαρτί)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단어는 과녁을 맞히지 못함에서 온 말인데 주로 인간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저지른 치명적인 죄를 말할 때 씁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긴다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산다든지, 사탄의 종노릇을 한다든지 하는 치명적인 죄를 말할 때 씁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잘못이라는 단어는 파랍토마(παράπτωμα)라는 단어를 썼는데 “~으로부터 떨어지다, 넘어지다”라는 단어에서 온 말로 실책, 과실, 허물 넘어짐이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치명적인 죄를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사람들이 고의 또는 과실로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넘어지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용서를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성도들이 치명적인 죄를 저질렀을 때 그냥 용서하면 안 됩니다.
그냥 용서해 주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그가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것이기 때문에 경고를 하고 회개를 하도록 해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치명적인 죄는 우리가 그냥 용서할 수도 없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용서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치명적인 죄가 아닌 실수를 저질렀거나 뭘 좀 잘못했다거나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는 용서를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 간에 가장 많이 일어나는 다툼의 원인들을 보면 대부분 별 것이 아닌 것들입니다.
나를 무시한다. 차별을 한다. 기분을 나쁘게 한다. 인사를 잘 안한다. 말을 본때 없이 해서 속이 상하다. 맘에 안 들게 행동한다.
이런 사소한 것들을 가지고 그것을 용서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를 잘 안나와버리고 예배를 안 드려버리는 큰 죄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의 사소한 잘못을 용서하지 못해서 자신은 오히려 그 형제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큰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잘못들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지를 때가 많습니다.
좋은 일만 많이 하고 싶고,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이고 싶고, 칭찬받을 일만 하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겐들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됩디까?
하고 싶은 좋은 일일 잘 안 되고 남에게 비난 받을 일만 많이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서로를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용서를 해 주라는 것입니다.
사소한 잘못을 비난하다가 더 큰 죄를 짓지 말고 너그럽게 용서하면 우리 자신의 잘못도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세사에 참 평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2. 어떻게 하는 것이 용서하는 것인가?
말은 쉽게 용서를 하지만 사실 용서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용서는 했지만 분노를 가슴에 묻어두는 사람도 많습니다.
용서는 했다고 하지만 두고두고 곱씹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외형적인 용서 가식적인 용서가 아니라 진정한 용서를 해야 합니다.
1)용서는 복수심을 없애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공의를 빙자한 복수심입니다.
나에게 잘못을 저지를 사람은 반드시 복수를 해야 식성이 풀립니다.
우리가 동해보복법으로 잘 알고 있는 출애굽기 21장의 말씀에 보면 인간들이 얼마나 복수심이 강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 23-25) 라고 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복수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다시 해석을 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동해보복법의 참된 의미를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해보복법을 주신 것은 복수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제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빨 한 대를 손해 봤으면 이빨 한 대만 복수를 하고 눈 하나를 손해 봤으면 눈 하나만 복수를 하라고 제한을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의 사람들이 악해서 지나차게 복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들이 어디 가서 얻어맞아서 이빨 한 대가 부러졌다면 가서 이빨 한 대만 부러트리고 오겠습니까?
이빨 전체를 다 왕창 부러뜨리든지 아예 복수심이 불타서 그 사람을 죽여 버릴지도 모르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복수를 제한하기 위해서 이빨 한 대면 꼭 한 대만 복수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 복수심이 늘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복수심을 없애고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까지 돌려댈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참된 용서라는 것입니다.
2)자신의 잘못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지적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은 대부부분 자신의 잘못을 볼 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늘 잘하고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 바로 비난을 하고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은 미화시키고 남의 잘못은 악화시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볼 줄 아는 것은 우리의 삶에 매우 유익합니다.
자신의 부족을 알 수 있기 때문이고,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이해할 수도 있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은 나의 거울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술을 많이 마시는 부모님을 가진 사람들은 같이 술을 배울 것이 아니라 술이 주는 피해를 배워야 합니다.
잔소리를 많이 하는 노인들에게서 잔소리는 남의 기분만 상하게 하고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대부분을 같은 마음과 같은 모습으로 삽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을 나 자신도 저지르고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하시기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어쩌면 더 큰 잘못이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허물을 비판하고 있는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나에게도 그런 잘못이 없나를 살펴보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용서의 지름길입니다.
3)잘못을 저지른 형제에게도 봉사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은 각자 자기가 가진 재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봉사자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는 살지 못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또 특별히 신앙생활은 서로의 힘을 합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준다는 의미에서 용서는 그냥 이해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된 부분을 서로 채워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 부족한 사람 그 사람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이웃이 되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사람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채워주려고 할 때 진정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3.잘못을 용서함으로 얻는 유익.
용서하는 것은 복수를 하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잘못을 살피는 것이며 오히려 잘못한 사람의 부족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용서만 하고 살면 용서를 해 주는 우리는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손해가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로 유익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1)하나님의 용서를 계속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모든 죄 사함을 받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용서는 이미 받은 것이고 이렇게 용서를 받은 사람을 누가 다시 정죄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여 우리의 잘못을 용서 받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많은 잘못을 저지름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형편이 업는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나름대로 잘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정말로 형편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는 짓이나 생각하는 하는 것이나 그냥 좋게 봐주니까 그렇지 하나하나 평가를 받아보면 정말로 지저분한 것이 우리 인생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정직하게 칭찬을 받을만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은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것이 참 좋은 일입니다.
뭘 잘 하려고 노력을 해도 잘 안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뭘 잘못해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고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복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복을 받을만한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시면 됩니다.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고 용서를 받으면 이 세상서의 모든 삶이 잘 풀려나갈 줄 믿습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나 부모나 뭘 잘 못하면 좋은 길로 인도한다는 명목으로 잔소리 하고 혼내고 그래서 불평하게 하지 말고 서로 잘못을 용서하게 하면 오히려 일이 더 잘 풀릴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진정으로 용서하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표시가 됩니다.
아무나 다른 사람을 진실로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용서받은 것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다는 확신이 있는 자는 다른 사람의 잘못까지도 다 용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고 생각할 때마다 원망이 생기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아무리 나쁜 일을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용서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3)용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야 됩니다.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라는 설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설교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지 않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물론 오늘은 말씀대로 살라고 설교를 하고 그 다음에는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처럼 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고 바르게 살고 하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용서받을 길을 찾으라는 말이 더 현실적인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계명들이나 신약성경에 와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계명에 대한 재해석이나 꼭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시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말씀을 드리면 꼭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하되 잘 안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는가를 얼른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흉악한 죄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작고 큰 잘못들에 대해서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잘못 용서함으로 나도 용서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용서받은 자가 또 계속해서 용서받기를 원하는 자가 행하여야 할 의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4)용서는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줍니다.
용서는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나에게 참된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용서는 나에게 있는 온갖 지저분한 것들을 깨끗이 청소하는 역할을 합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교만을 없애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지나친 욕심을 없애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미움과 시기 질투를 없애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원망과 불평을 없애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내 마음 속에 참된 사랑을 움트게 하고, 자비로운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싹트게 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참 사랑과 참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 매일 매일 저지르는 잘못에 대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을 없애주고 참된 평안과 사랑을 가져다주는 너무나 귀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진정으로 용서하면서 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