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7. 10.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21)
본문 : 마 5:46-48
제목 : 너희도 온전하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종결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절대적인 우위를 가질 만큼 월등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종결자라고 합니다.
더 아름다울 것이 없는 최고의 미녀를 미모의 종결자라고 합니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을 가창력 종결자라고 합니다.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을 기타연주의 종결자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온전하라”에서 “온전”이라는 말이 이런 종결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온전하라의 헬라어는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입니다.
끝, 종말, 결말을 뜻하는 텔로스(τέλος)에서 온 말로 목표에 도달한, 완전한, 성숙한, 완결한 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은 모든 면에 온전한 분이십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모든 일에 끝내주는 종결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최종의 최고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는 최종의 최고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온전하라는 말은 바로 앞에 나오는 사랑에 대해서 온전하라는 말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교훈에 대해서 완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넓게 생각하면 21절 이하에 있는 “대립명제”에 대해서 온전하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신 것을 대립명제라고 합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는 교훈을 너희가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이런 “대립명제”에 대해서 온전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인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온전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종결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비록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것을 목표로 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연약한 인간임을 고백하면서 끝까지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보통 또는 보통 이하의 사람
오늘 본문 말씀에 “세리”가 등장하고 “이방인”이 등장합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세리나 이방인은 보통 이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는 창기와 같이 죄인의 대표 주자였습니다.
죄인을 나타낼 때 제일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세리요 창기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금징수 같은 일은 로마정부에서 임명하여 파송한 관리들에 의해서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세리란 로마정부에서 파송한 관리가 아니라 그 밑에서 일을 하는 본토출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세리를 죄인 취급한 것은 세리들이 유대인이면서 로마정부 편에 서서 로마정부에 유리하게 세금을 거두고 때로는 그 세금 일부를 착복하고 이방인인 로마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매국노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도 일제치하에 살 때 일본군 앞잡이가 되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고발하고 괴롭히면서 일본인들과 친하게 지내고 이익을 얻는 친일파 매국노들이 있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 세리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 세리들을 매국노요 죄인의 대표자로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이하의 짐승과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볼 때 이방인이 인간 이하의 짐승과도 같은 존재라고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고 이 세상 사람들은 사탄의 종노릇을 하는 참 불쌍한 인생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원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상종하지 말아야 할 천한 사람들이 이 세상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보통이하의 천한 사람들도 보통 사람들처럼 기본적으로 해야 할 도리는 하고 살더라는 것입니다.
세리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자기 형제들에게는 문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죄인의 대표주자격인 세리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사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못한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오히려 해치는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님에게도 효도를 하지 못하고 돌보지 않고 오히려 재산을 빼앗으려고 함께 살자고 하고 박해를 가하는 자식들도 있다고 합니다.
신문을 보면 재산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해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짐승과 같은 이방인들도 자기 형제들에게 문안을 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성도들이 서로에게 문안 인사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형제들과도 담을 쌓고 사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원수처럼 대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2.남보다 더하는 사람
본문 47절 말씀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죄인의 대표 격인 세리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할 줄 알고 짐승과도 같이 취급한 이방인들도 자기들의 형제들에게는 문안인사를 할 줄 아는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성도들은 최소한 그들보다 더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남이란 우리 성도들 외에 사람들 세리와 이방인과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멸망을 하고 말 이 세상 사람들도 서로에게 잘하고 살려고 하는데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면서 거기서 받을 상을 기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그들보다 뭔 좀 더 잘하고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사는 우리 성도들이 도덕적으로 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들보다는 더 하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으로 만족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욕을 해서도 안 되고 화를 내서도 안 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무시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잘 못한 것이 있으면 가서 화해를 하고 잘 지내는 것이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꼭 남의 여자를 범하는 것만이 간음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죄와 같다고 생각하고 그런 의도 자체를 갖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오른 뺨을 때리는 자가 있으면 왼편도 돌려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 되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더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보다 더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 웬만해가지고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못하고 삽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똑같이 하면 그냥 보통 사람이 되고 맙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조금 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오리를 함께 가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오리만 가주면 별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오리를 가 달라고 하면 십리를 가주는 것이 더 하는 사람입니다.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만 주면 별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겉옷까지 줘야 더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보통 사람이거나 보통 이하의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는 것이 더 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남들이 공부하는 것만큼 공부하면 안 됩니다.
남들이 공부하는 것보다 더 많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남들이 일하는 것만큼 일하면 늘 그대로입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일을 해야 돈을 많이 법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이 더 빨리 출세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남들 하는 것만큼 하면 상을 받지 못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설교를 듣는 것이나 기도 생활이나 봉사나 충성이나 좀 더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저 내 힘에 닿는 대로만 하면 상급이 없습니다.
내 힘에서 좀 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남는 시간만 교회에 오면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없는 시간도 쪼개고 다른 것 할 시간을 희생해서 교회에 와야 합니다.
기도하고 싶을 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더 기도하는 시간을 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에 있어서 좀 더 힘을 내야 합니다.
인간관계나 도덕적인 삶이나 세상을 사는 것이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뭐든지 좀 더 노력을 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온전한 삶을 사는 사람
본문 48절 말씀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온전하다는 말은 앞서 말씀을 드린 대로 종결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모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완벽하게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는 일들도 그저 꼭 해야 할 의무조차도 제대로 이행을 하지 못하고 사는 우리에게 모든 일에 온전하라는 말은 도저히 실천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가능한 말씀을 왜 우리에게 요구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신데 잘 아시면서도 왜 이런 요구를 하시는 것일까요?
1)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고도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제정해주신 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외형적으로 가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면서도 모든 것을 바르게 하는 의로운 사람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나 보통 사람 이하의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가까운 이웃에게 당연히 해야 할 문안을 하면서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을 합니다.
좀 더 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부금을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도와주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희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를 가지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완벽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은 40일 금식기도 한 것을 가지고 의로 여깁니다.
그 정도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다 들어 응답을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모아서 헌금을 많이 한 것을 가지고 의로 여깁니다.
헌금한 것을 보고 그것을 의로 여기고 복을 많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그것을 의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복을 많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기도를 많이 하는 자에게 헌금을 많이 하고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기특하게 생각을 하시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롭기 때문에 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는 불의한 자들이며 우리의 기도나 헌금이나 순종은 은혜 받은 자에게 당연한 것이지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많이 달라고 조르는 기도가 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물질 일부를 드린다고 그것이 나의 의가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자랑할 만한 것은 못됩니다.
사람들이 하도 악해져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들을 안 하니까 우리가 당연히 행할 것을 하는 것도 좋아 보일 뿐이지 그것이 의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모든 것을 잘 한다고 해도 그것이 완벽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온전한 삶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추구하고 따라가야 할 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비록 죄인 된 우리가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평생 따라가야 할 길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선한 일을 하고도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더 노력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잘 해도 목표치에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 13-14)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한 일들에 대해서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한 일들이 아무리 잘 한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별 소용이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온전한 삶이 못되기 때문에 더 노력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또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을 더 큰 은혜를 생각한다면 아무리 죽을 고생을 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했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만족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처럼 날마다 날마다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도달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디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보통이나 보통 이하의 사람들입니까?
남보다는 더 잘 하는 사람들입니까?
온전한 사람을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세리나 이방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잘 하려고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인 줄 알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인줄 알지만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