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5.5.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로마서 강해설교 143)
본문 : 롬 13:3-5
제목 : 선을 행하라 


우리가 로마서를 통하여 배운 교리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스스로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기준에 도달할만한 선을 행하거나 의로운 사람이 되거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어 선한 사람이 되어 구원을 받는 길은 우리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대신 죽어주신 그 구속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은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이 길만이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의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우리 스스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을 믿는 일에만 총력을 다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내 스스로는 아무리 착하게 바르게 살아 보았자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으니까 이제 선을 행하는 일은 포기하고 예수님만 믿는다고 하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타락하여 우리 스스로는 선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 앞에 설 때만 선한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선한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선한 일을 하면서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관원들을 주셨습니다.
선한 일을 할 때에는 상을 주고 악한 일을 할 때에는 벌을 주는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면서 살도록 양심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 만물을 질서 위에 하나님의 법칙 위에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이 질서를 지키며 바르게 살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질서는 선한 일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시고 이 땅에서도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선한 일을 많이 하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1.선을 행하게 하기 위해 관원들(통치자들)을 세우셨습니다 
본문 3절 말씀에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관원들"이라는 말은 왕, 임금,지배자,통치자,우두머리..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앞 절에서 말하는 권세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권세자들을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그 권세자들은 그 관원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선을 행하면서 살게 하기 위하여 세우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이 관원들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게 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이 세상의 관원들을 두려워하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권세자들이 많이 있고 관원들이 많이 있어도 선을 행하면서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면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윗사람을 두려워합니다
누구의 간섭을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심지어 부모님의 간섭도 싫어합니다
쓸데없는 간섭을 하거나 필요없는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이 되기 때문에 누구의 간섭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는 자신이 없기 때문에 잘못의 질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위에 있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위에서 누가 시키는 것을 싫어합니다
비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려고 하다가도 청소해라 라고 하면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지혜가 있는 젊은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직접 시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밥을 먹으라고 할 때도 옛날에는 야 밥 먹어 먹기 싫으면 치우고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애야 밥 먹으래 안 먹을래 라고 아이의 의사를 물어 본다는 것입니다.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고 또 무조건 명령을 하는 것처럼 보여서 거부감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습성들이 아이가 앞으로 자라서 사회에 나갔을 때 상관이나 윗사람이 무엇을 시킬 때 거부감을 가지게 할까 봐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 자신이 최고인 것처럼 살다가 자기 자신이 대장인 것처럼 살다가 누가 무엇을 시키면 거기에 적응을 하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 위에도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하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고 이런 권세들을 관원들을 상관들을 두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해 주신 말씀 중에서 이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들이 부유한 집안에서 문제 없이 자랐지만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겠다는 마음으로 유산을 미리 받아서 집을 나갑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유혹에 빠지고 허랑방탕하게 되고 거지 신세가 되어서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비유는 그런 아들이지만 다시 받아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우리가 범죄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지만 다시 돌아 올 때 하나님께서 다시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 그 권세 아래서 나가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가출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집에서 부모님들이 하는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아예 집을 나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성인이 되어서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회사에 들어가서도 상관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때려치우고 나오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군에 입대해서도 견디지 못하고 탈영을 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뒷 이야기는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타락하고 낙오하고 악해지고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참 불행한 일이 뒤따라온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우리 위에 많은 권세들이 있고 우리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우리가 이 땅에 선하게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그런 명령에 따를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모든 일에 잘 할 수만 있다면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인지라 모든 일에 잘 할 수 없기 때문에 위에 있는 권세들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두렵고 상관이 두렵고 나라의 관원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위에 있는 권세들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하든지 좀 더 선하게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위에 있는 권세들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며 회피할 것이 아니라 그런 제도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더욱 선하게 살려고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2.선을 행하게 하기 위해 형벌제도를 두셨습니다
본문 4절 말씀에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인하여 보응하는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관원만을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이 선을 행하면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관원뿐만 아니라 그 관원들에게 칼도 주셨다고 했습니다.

칼은 헬라어 마카이라(μαχαιρα)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마카이라는 로마시대에 쓰던 단검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이 단검은 죄수를 사형시키는데 사용하던 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칼은 사형까지를 의미하는 여러 형벌제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이 선을 행하면서 살게 하셨고 선하게 바르게 살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생들은 언젠가는 각각 자신이 이 땅에서 행한 행위대로 하나님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최후의 심판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일을 끝내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관원들을 두시고 그 관원들에게 칼 즉 여러 가지 형벌제도를 두셔서 이 세상에서 사람의 심판을 받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잔소리를 듣는 것도 싫어하지만 벌을 받는 것은 더 싫어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웬만한 가정에서는 아이가 잘못을 저질러도 벌을 잘 주지 않습니다.
조금 잘 하면 상을 주는 제도를 만들어서 아이들이 선하게 살도록 하지 벌은 마음이 아파서 잘 안줍니다

아이들이 잘못을 했을 때 매를 들고 벌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당시에도 잘못을 고칠 뿐만 아니라 사회에 나가서도 아 잘못을 하면 벌을 받게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고 바르게 사려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못을 해도 벌을 주지 않으면 사회에 나가서도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쉽게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사실 교회에도 이 벌을 주는 권징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은 이 권징제도가 그냥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냐 하는 것을 구별하는 세 가지의 지표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파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성례식 즉 세례와 성찬을 바르게 행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가 올바른 권징을 행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가 바르게 시행될 때 그것이 참된 교회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잘못하면 벌을 주는 이 권징제도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권징을 행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권징을 행하면 교회를 떠나 버리기 때문에 행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이런 권징을 시행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즉 잘못해도 벌을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죄를 쉽게 짓고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과 형벌마저 잊게 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형벌제도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억울하게 벌을 받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들키지 않아서 벌을 받지 않는 불합리한 일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형벌제도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나마 이런 형벌제도가 없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불법천지 무법천지가 되어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항간에서는 사형제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인명을 인간이 함부로 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인생의 생명은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생명까지 끊는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사형제도가 없다면 그 사형수의 생명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타의에 의해서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함부로 사형제도를 폐기하자고 할 수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사형제도 자체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도이며 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선하게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제도들이 옳고 바르게 집행이 되도록 우리 모두가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3.선을 행하게 하기 위해 각 사람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본문 5절 말씀에 "그러므로 굴복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오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선을 행하면서 살게 하기 위해서 관원과 형벌제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도를 통해서는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각 사람의 마음속에다가 양심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양심에 따라서 남들이 보던 보지 않던 간에 선을 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지만 속에 있는 양심의 소리가 그 사람의 행동이 선한 행동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양심이 완벽하게 사람의 마음을 지켜 준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사람의 양심은 참으로 연약하다고 했습니다(고전8:7,12)
그리고 선한 양심과 깨끗한 양심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서 악하고 깨끗하지 못한 양심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둑들이 남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쳐 가지고 서로 똑같이 분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욕심을 내서 좀 많이 가지려고 했습니다.
그 대 한 도둑이 말합니다 야 이 양심도 없는 놈아 똑바로 나누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양심을 따라 산다고 해도 그 양심을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다수의 사람들은 비교적 바른 양심을 가지고 바르고 착하게 사려고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태양과 해시계의 관계와 같다고 했습니다.
해시계는 태양이 있을 때에만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해가 가리워져서 비치지 않는다면 그 해시계는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양심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할 때만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을 받지 못한다면 그 양심은 바른 양심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심 자체로 모든 사람이 선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세상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좀 더 선하게 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기억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관원들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형벌의 권한도 주셨습니다
또 각 사람에게는 양심도 주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하여 더욱 선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