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3.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로마서 강해설교 135)
본문 : 롬 12:10-11
제목 : 사랑의 실천
로마서에 기록된 말씀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2천여 년 전 타락했던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생각하며 그 시대를 배경으로 말씀을 기록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말씀을 이해할 때 좀 더 그 뜻을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을 주제로 말씀을 듣고 있는데 당시 로마인들에게는 사랑이란 에로스사랑 즉 남녀간의 육체적인 사랑과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한 사랑이라는 개념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로마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인종과 성별과 나이와 계급을 초월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핵심 복음을 전할 때 이러한 소문을 들은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음란한 종교라고 오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랑이라고 할 때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사랑과 차별을 두고 사랑을 설명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랑이라는 말을 쓸 때 그 에로스라는 말을 한번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헌신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αγαπη)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받을 형벌 대신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로 죽게하신 그 사랑을 말할 때 아카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단어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그 곳이 바로 천국이 되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화려한 곳이라고 해도 그 곳은 지옥과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지만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지만
사랑한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실제로 참된 사랑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우리 광성교회만큼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세상이 어떻게 된다고 해도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자고 여러분의 목사가 날마다 외치지만 실제로 사랑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는 모습들을 보면서 사랑은 힘든 것이구나 생각합니다
사랑이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이 말만 이론만 사랑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면서 실제로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할 줄 아시고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씀을 하신 후 그 실천 방법을 이렇게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1. 형제애로 서로 사랑하라.
본문 10절 말씀에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형제를 사랑하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필라델피아(φιλαδελφια)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 사랑은 피를 나눈 혈육인 형제지간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서로 우애하고 라는 말에서 우애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휠로스스톨고스(φιλοστοργο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휠로스(φιλοs)와 스토르게(στοργη)가 합쳐진 말입니다.
휠로스라는 말은 좋아하는 가장 사랑하는 친절한 다정스런 이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리고 스토르게란 가족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그래서 형제애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친형제간에 서로 사랑하는 그런 사랑으로 가장 친절하고 다정한 가족간에 나누는 그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실 때 아카페적인 사랑 즉 자기를 희생하는 그런 사랑을 말씀하시지 않고 형제애로 가족애로 서로 사랑을 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아카페적인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음을 아시고 그 수준을 좀 낮춰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그런 차원 높은 사랑은 너희가 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너희들 핏줄간에 가족간에 하는 그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을 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 말하는 형제란 육신의 형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각자의 성을 가진 최씨 이씨 김씨 양씨 임씨 여러 가문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볼 때 육신의 핏줄로 태어난 그 형제보다 더 진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육신의 형제가 사랑을 나누듯이 한 가족끼리 가족간의 사랑을 나누듯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 진한 그런 사랑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형제애나 가족간의 사랑은 그 색갈이 매우 퇴색했습니다
형제간이나 가족간에도 이기적이고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사랑으로 물들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요즘은 친형제가 논을 사도 배가 아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서로 진정으로 도와주고 서로 잘되는 것을 좋아하는 진정한 형제애는 찾아보기가 힘든 세상이 오늘날 우리의 세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제애란 그런 퇴색한 이기주의적인 형제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그 모습의 참된 형제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황금을 강물에 던진 형제 이야기를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고려 공민왕 때 대단히 우애가 깊은 한 형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 형제가 길을 가던 중 동생이 황금덩이를 줍게 되었습니다.
아우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다 가지고 싶은 욕심이 솟는 것을 누르고 형과 반씩 나누어 갖기로 하였습니다.
이윽고 강가에 이르러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가 중간지점정도 왔을 때 동생이 갑자기 금덩이를 형 앞에 내어 놓더니 "형님, 제가 이 금덩이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형님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에 조금의 흠도 없었는데 이 황금을 발견하고 나누어 가질 생각을 했을 때 욕심이 생기고 형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전 이 금덩이를 저 강물에 던져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형님이 아우의 손을 잡으며 "그래, 네 말이 옳구나"하면서 둘이서 힘껏 금덩이를 강물 한가운데로 던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형제애에 방해가 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값비싼 황금이라고 할지라도 사정없이 내어 버릴 줄 아는 것이 형제애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주 작은 이익 앞에 서로 미워하고 서로 등을 돌립니다
우리의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물질적으로 큰 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포기할 줄 아는 것이 형제애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본문 10절 말씀에 형제를 사랑함에 있어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에는 존경이란 고차원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간의 사랑이 퇴색될 때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잘못된 사랑으로 퇴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형제간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에다가 놓치기 쉬운 존경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존경할 때 가족 애 형제애는 더욱 빛이 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면 다야 아버지다운 아버지이어야지 라고 아버지를 무시할 때 그 가족 애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형이면 다야 형 노릇도 못하면서라고 생각을 하면 그 형제애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간의 사랑이나 가족간의 사랑에도 이 존경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의 존경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티메(τιμη)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값", "가치", "평가하다" 라고 도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즉 이 말은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존경할 때 서로간의 사랑은 참된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형제같이 사랑하면서 동시에 존경으로 나아가는 사랑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존경심은 나보다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항상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관계의 근본이 존경심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남을 존경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비록 이웃이 낮은 지위에 있고 가진 것이 많지 않고 한 때 실수가 있어도 우리는 그것 때문에 남을 업신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 존재 자체를 존경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 기독교 윤리의 근본입니다.
우리들이 서로 존경할 수 있는 이유는 상대방의 개인적 인격이나 능력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의 크신 구속의 은혜를 입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아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생각할 때 그 형제의 인간적인 모든 조건을 떠나서 진실하게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우러러 나는 것입니다.
또 존경할 때 서로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고 남들이 나를 알아주고 나를 존경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고 존경해 주면 그 때서야 행복해 합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존경해 주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불평을 하 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하여 평가를 받고 칭찬을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지 말고 다른 사람이 잘한 일을 찾아가서 높이 평가해 주고 가치가 있는 일로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가치없는 인간으로 평가를 받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마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존경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정의 평화는 서로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서로 칭찬을 하고 서로 존경을 하면서 사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은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부모들은 자식이 존재하기에 내가 더욱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남편이 있기에 내가 있고 아내가 있기에 내가 존재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며느리라는 나의 존재가 비로소 있다는 것을 알 때 고부간의 갈등은 사라질 것입니다.
3.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본문 11절 말씀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라고 했습니다.
이웃 사랑의 힘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 부모님을 무시하고 형제들을 무시할 것으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을 뜨거운 마음으로 섬긴다면 그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부모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부모형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 부지런하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특별히 근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앙 생활의 나태를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보통 성도들은 처음 믿을 때에는 매우 열심이다가도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이게 되면 주를 향한 처음 사랑을 잃고 영적인 타성에 빠져 미지근한 신앙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2) 게으르지 말고 라고 했습니다.
게으르지 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오크네로이'인데 이는 근심이나 걱정 또는 부끄러움으로 늑장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된 삶은 게으르거나 나태할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말은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근본 문제를 지적해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 우리는 시험에 자주 빠지는가?
왜 우리는 자주 넘어지는가?
왜 우리는 사소한 일에 화내고 미워하고 괴로워하는가?
주를 섬기기는 해도 열심을 품고 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열심히 바라보면 세상이 작게 보일 텐데 오히려 세상이 엄청 커 보이는 것은 그만큼 주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열심을 품고라고 했습니다
열심을 품고라는 말에는 영 혹은 성령으로 해석이 되는 프뉴마라는 말을 생략을 했습니다.
열심을 품으라는 말을 살펴보면 영에 관하여 혹은 성령에 관하여 끓어오르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마음이 뜨겁게 되든지 영적인 일로 뜨겁게 되든지 열심을 가지고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열심이라는 것은 참으로 좋은 무기가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하는 사람은 그 일에 성공을 할 확률이 참으로 높은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것은 성공을 할 확률이 매우 저조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힘이 되는 것은 성도들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그 한마디가 참 큰 힘이 됩니다
가장 힘을 잃게 하는 것은 못합니다 안됩니다 그만두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이 교회의 일들은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이 일에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 위해서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했습니다(시편121:4),
우리 주님은 모든 만민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고 일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요한복음5:17).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영(성령)을 체험한 성도들은 열심이 충만합니다.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다니엘과 같은 성경의 인물이나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인물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열심이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자와 같이 열심(熱心)이 특심(特甚)인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선한 일에 이 좋은 일에 주님을 섬기는 이 귀한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열심을 내는 것도 아무 일에나 열심을 내서는 안됩니다
한 선원이 성실과 열심히 살았는데 지옥에 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일하던 배는 해적선이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선한 목표가 없는 열심은 오히려 저주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선한 일에 열심을 내기보다 이 세상의 일에 열심을 많이 냅니다
심장은 인간을 살고 움직이게 하는 중심기관입니다. 남자는 평균 300g, 여자는 250g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심장을 저울로 단다고 합니다.
심장을 달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교회생활을 한 분이 천국에서 심장을 재었더니 천국 역사상 최고치인 38kg가 나오더랍니다.
그런데 다시 세분해서 나오는데,
자기 명예(이름)를 위한 열심 4kg,
년 말에 목사님께 관심 끌고 직분받으려고 낸 반짝 열심 6kg,
박 집사를 시기하고 질투한 열심 12kg,
이 집사와 경쟁하기 위한 열심 8kg,
봉사하면서도 조 집사는 일을 하느니 안 하느니 간섭하고 최 집사는 어떠니 저떠니 비난하고 목사님은 왜 이런 일을 하라고 하느냐고 불평 불만하면서 한 열심5kg.
김 집사와 일의 방식과 주도권을 가지고 다투고 싸우면서 한 열심이 2kg,
결국 참 믿음과 순전한 마음으로 한 열심은 1kg밖에 안 남더라는 것입니다.
누가 만들어 낸 이야기지만 참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참으로 주님을 섬기는 열심 선한 열심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 서로에게는 이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형제애로 가족간에 나누는 뜨거운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는 그런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도 기억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이 참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것이 그 사랑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기억을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