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2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로마서 강해설교 134)
본문 : 롬 12:9
제목 :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미국의 한 교육학교수가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조사하였습니다.
첫째 항상 기뻐하는 낙관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비관적이며 부정적인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항상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낙관적인 사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믿고 영원한 승리를 확신하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며 낙관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보람을 아는 사람입니다. 현재 하는 일을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사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가지고 그 사명을 위해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기 때문에 가난한 집에 시집을 와서 고통 속에 산다고 할지라도 못난 사람을 아내로 혹은 남편으로 혹은 부모로 혹은 자식으로 두고 산다고 할지라도 보람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입니다. 곧 진정한 행복의 조건은 소유나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풍성한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잘못 믿고 잘 못 살아서 그렇지 제대로 알고 제대로만 산다면 믿음생활을 하는 우리는 사랑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침에 한번 우리 인사를 합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을 믿음으로 기쁨 속에서 살고 하나님께 받은 사명으로 보람있는 일을 하고 살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귀한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물질적으로 풍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문화적으로 발달된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공허하고 불안 속에서 쫓기듯 살고 있습니다.

이 불안과 공허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참된 사랑을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인간의 행복, 그리고 진정한 인간의 회복은 오직 사랑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2:37-40절에 예수님께서도 사랑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있어서도 이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것이 모든 성경의 가르침의 완성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십계명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어떤 형상을 하나님 대신으로 만들어 거기에 절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데 대해서 용납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일주일에 하루를 하나님을 섬기는데 쓰는 것이 기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 살인을 하거나 간음을 하거나 도적 질을 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증거를 하거나 이웃의 것들을 탐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최고의 은사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대로 6절에서 8절까지에는 일곱 가지 은사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사랑도 은사 에 포함시켜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에는 은사에 대해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2장에는 여러 가지 은사들이 소개되어 있고 이어서 13장에는 "더욱 큰 은사" "제일 좋은 길"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사랑에 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1)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라고 했습니다.
방언은 교회에서 여러 가지 말이 많은 은사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방언은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방언을 말함에 있어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하는 방언의 잘못됨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4장에는 이렇게 설명들을 하고 있습니다.
14:5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가 만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이 방언을 함에 있어서 아주 조심을 하고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천사의 말'은 욕지거리가 담긴 우리 죄인들의 말과는 달리 선하고 아름다운 용어로 가득한 아름다운 말을 말합니다.
그 자체로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방언과 천사의 말이 가치가 있고 힘이 있어도, 그것을 말하는 우리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전혀 쓸모가 없는 말이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2) 예언과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2절 말씀에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 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예언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 인생의 모든 장래가 아주 정확하게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언의 말씀을 아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언의 말씀을 구구절절 다 알고 다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는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중한 믿음도 사랑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에 있어서도 사랑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 구제와 헌신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역시 고전 13:3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구제는 나보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보는 구제에 대하여 특별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면서 헌신을 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제와 헌신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 또한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은사가 모든 은사에 필요한 은사이며 모든 은사 중에 최고의 은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사랑의 은사를 소유한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랑엔 거짓이 없습니다.


이렇게 귀중한 사랑의 은사에는 거짓이 없다고 했습니다. 거짓이 없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뉘포크리토스(ανυποχριτοs)라고 합니다.
이 말은 "가식이 없는" "거짓 없는" "있는 그대로" "진실한" "성실한"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 아뉘포크리토스라는 말은 연극배우가 탈을 쓰고 연기를 한다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이 말은 사랑이란 연극배우가 무대에 서서 탈을 쓰고 연기를 하는 것 같은 그런 거짓이 아니라 진실하고 순수하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란 연기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없으면서 겉으로 그런 척하는 그런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고 사랑을 하려고 하지만 진실로 사랑을 하는 훈련보다는 남들이 보기에 사랑하는 것 같이 보이는 그런 훈련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백화점 같은 데서 종업원들에게 친절교육을 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이 겉모양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을 교육시킵니다. 웃는 얼굴을 하고 상냥스럽게 인사를 하고 말씨도 상냥하게 하게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고객이 얼마나 중요한가 고객들에게 왜 감사를 해야 하나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손님이 와 주는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갖기보다는 겉으로 반가운 척 상냥한 척 하는 것입니다.

칭찬해주는 것이 좋다고 하니까 코를 흘리고 서 있는 아이를 보고 아이고 이놈 참 잘생겼다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잘 생기기는 누구 닮았는지 지지리도 못났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속은 어떻게 되든지 겉으로만 사랑하는 척 하고 말로만 사랑하는 척 하고 또 선물이나 사 주고 외형적으로 사랑하는 척 하는 그런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진실한 사랑은 마음 깊은 것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사랑이 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도 겉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척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어렵고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할 이유도 모르면서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은 조그마한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문제를 만들고 그것을 핑계로 교회를 떠나고 성도들과 등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혹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핑계를 댑니다. 교회가 좋지 않아서 목사가 기분 나쁘게 해서 아무개 집사가 보기 싫어서 헌금하는 것이 부담이 돼서 봉사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그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 깊이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잘못을 해서 보기가 싫다 누가 잘못해서 이것저것 때문에 이혼을 한다하는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들도 이 사랑이 없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진실한 사랑을 하게 된다면 모든 인간관계는 정말 훌륭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사랑이 없이 그저 겉으로만 사랑하는 척하거나 어떤 이익을 위해서 사람을 사귄다면 그 관계는 금새 나쁜 관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척 하고 잘해주는 척하고 들어서 기분 좋은 말하고 하는 그런 외식적인 것을 배울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 속에서 이 사랑의 은사가 불일 듯 일어나게 하옵소서.
거짓이 없는 꾸밈이 없는 참된 사랑의 은사 거짓없는 참 사랑의 은사가 용솟음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거짓없는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고 저 사람의 사랑이 참 사랑인지 거짓 사랑인지 잘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구별하는 외형적인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악을 미워하느냐 악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보고 구별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에는 익숙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 되시고 죄악을 미워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은 간과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죄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판사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가장 친한 친구가 죄를 짓고 재판을 받을 왔습니다. 너무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그 정을 생각하면 눈 딱 감고 무죄 선언을 하고 내보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공정해야할 판사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죄책감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재판관은 그 친구를 사랑하지만 죄를 미워하고 죄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는 자신의 임무를 잃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을 하던 중 이렇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벌금 1억 원에 처한다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의 벌금을 대신 내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죄를 그냥 묵인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우리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죽을 대신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도 이런 원칙이 적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즘 연속극이나 영화같은 것을 보면 사랑이란 이름으로 여러 가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부당한 일들이 미화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부당한 것은 불법적인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됩니까라고 하면서 아무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지 참된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자녀들이 죄악에 바지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자유롭게 죄를 짓도록 묵인을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가슴이 아프지만 회초리를 들고 우리의 자녀가 죄악의 길로 이 세상의 죄악의 유혹으로 바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악에 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 사랑은 선에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속한 것이라는 말은 접착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선한일과 아주 딱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모든 은사 중에 가장 귀한 은사입니다.
그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그 거짓없는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 것입니다.
이 참된 사랑 안에 거하심으로 참된 행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