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27. 광성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산상보훈12)
본문 : 마 5:17-18
제목 : 율법의 완성.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끔 갈등을 겪는 것 중에 하나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율법을 지켜야 하고 절기들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데 신약성경에 보면 제사제도나 절기들이 없어지고 율법을 행하는 것도 그렇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신약성경에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선택받은 선민이라고 했는데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 땅에서 잘 살고 장수하는 것이 복이라고 했는데 신약성경에서는 오히려 이 땅에서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우리의 복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운 로마서 10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끝내버리셨다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롬10:5)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인이 됐지만 이젠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그 행함이 따라야 된다고 하면서 율법의 행함을 구원받은 사람이 행하여야 하는 것으로 은근히 말함으로 행함이 구원받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는 행함이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행함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행하여야 할 의무라고 말합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은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구약성경과 신약성경과의 갈등관계를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들과 서신서들을 잘 살펴보시면 그들이 이 갈등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행적들이 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들이 구약성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그 해석이나 적용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즉 구약성경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경의 말씀을 완전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갈등을 해소하고 율법의 행함과 은혜의 선물인 믿음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1.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예수님
오늘 본문 말씀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율법이나 선지자’ 라고 하신 것은 구약성경을 일컬어 하시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모세오경을 가리키기도 하고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선지자’는 구약성경의 선지서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율법이나 선지자’라고 할 때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구약성경의 말씀들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하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완전케 하다'라는 단어는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면서 ‘완성하다’ ‘성취하다’ 라는 말로도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구약성경의 말씀을 완전하게 채우시기 위해서 또 그 예언들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숨은 그림 찾기나 퍼즐 맞추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내용 속에는 어떤 숨은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이나 교훈들 속에 그 사건이나 교훈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숨은 그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을 다 제대로 맞추어 보면 하나의 큰 그림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숨은 그림이 무엇이며 그 완성된 퍼즐의 그림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보는 것이 구약성경을 잘 보는 것입니다.
그 숨은 그림과 완성된 퍼즐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잘 아십니다.
그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성경이 오실 예수님에 관한 글이라고 하는데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그렇게 확실히 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줄은 알지만 확실히 그렇게 믿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구원에 관한 많은 기사들을 읽습니다.
노아홍수 때부터 살펴보면 세상 사람들이 다 홍수로 죽게 될 때 노아와 그 가족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불탈 때 거기 살던 사람들 중에 롯과 그 딸들만 구원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탈출시킵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고 요단강을 건너게 해서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유다가 망해서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 남은 자들 중에서 소수의 사람들을 귀국시킵니다.
수많은 전쟁 수많은 재난 수많은 병마와 고통 속에서 사람들을 구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구원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숨은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그런 구원들의 완성이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구약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한 핵심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많은 절기들과 의식들을 봅니다.
유월절이나 여러 감사절이나 속죄일이나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여러 종류의 제사들이 모두가 다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절기의 의미들이 그 제사에 쓰인 제물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활동한 위대한 인물들을 봅니다.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그렇게 유명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맺어주신 많은 언약들을 발견합니다.
노아에게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다윗에게 그 후손들을 통한 왕의의 보장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외에 수많은 크고 작은 언약들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언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구원의 사건들과 제도들과 언약들의 성취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구약성경을 부인하거나 없애기 위하심이 아니라 그 예언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 성취의 결과로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2.구약의 율법의 뜻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분이 아니시다. 천지가 없어진다고 해도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할 때 사람들은 봐라 율법은 지켜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은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오해한 것을 바르게 잡아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율법하면 생각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십일조 헌금을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가장 오해하기 쉬운 것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정말로 잘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일이었고 그래서 아주 세심하게 잘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않고 집에 있어야 되는데 그라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때 얼마만큼 움직일 수 있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정해놓고 행동을 했습니다.
만약에 안식일에 집에서 키우는 소나 나귀가 고삐를 풀고 도망을 나가면 잡으러 가야할 까요 그대로 두어야 할까요?
잡으러 가면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되고 그대로 두면 너무 아깝잖아요? 그래서 원칙을 정합니다.
소나 나귀가 도망을 가면 2천 야드(약 1800미터)까지는 달려가서 잡을 수 있고 그 이상 가면 안 된다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 근거는 도피성까지의 거리를 환산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고의가 아닌 과실로 살인을 했을 때 도피성으로 도망을 가면 그 안에서는 용서를 받고 죽임을 당하지 않는 제도가 도피성제도입니다.
그래서 짐승을 구하는 거리도 그 도피성거리인 2천 야드까지는 가능하다고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 대신에 주일을 지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날 모이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모이는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꼭 그렇게 하라는 말씀은 없는데도 우리는 주일을 안식일처럼 지킵니다.
우리 어렸을 때 주일을 안식일처럼 아주 엄격하게 지켜야 했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멀어도 차를 타지 못하고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주일날 무엇을 사다가 먹는 것은 죄라는 생각 때문에 하지 못했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봐야 하고 자격증 시험을 봐야 하는데 주일이기 때문에 시험을 보러가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가족은 물론이고 일하는 하인들과 짐승들까지도 아무 일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렇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 차를 몰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운전기사들이 운전을 해야 차가 움직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 교회당도 지금 한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전기가 들어와서 불도 밝히고 음향기기도 사용하고 악기들도 사용을 합니다.
어차피 지키지 못하는 율법인데 사람들이 괜한 고생들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킨다고 할 때 율법을 받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과 어떤 목적으로 그런 율법을 주셨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수천 년에 걸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여자 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왜 제정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날을 지키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시면서 안식일을 제정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씀에서 그날을 기억하고 또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쉬는 것도 그 의미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날만이 하나님의 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사는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여섯 날들이 우리에게는 더욱 감사할 날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면서 이 우주 만물이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음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루를 안식하면서 우리도 하나님처럼 열심히 일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주일은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부활하신 주일날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날들입니다.
다만 오늘 하루는 더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어서 험한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준비를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주신 것처럼 이 거룩한 주일 주님 앞에 나와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들에게 크신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는 날 그 능력을 받는 날 그날이 안식일이요 주일인 것입니다.
십일조에 관한 율법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또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 먹고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정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그 십일조 헌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운영합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에 대해서 꾸짖으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도다.”(마 23:23-24). 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십일조도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여기 박하와 회향과 근채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향료나 양념으로 쓰이는 식물들입니다.
이 식물들은 아주 조금만 쓰는 것이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도 별로 돈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작은 것들을 드릴 때는 아주 철저하게 드립니다.
그런데 큰 것을 드릴 때는 대강 넘어가더라는 것입니다.
하루살이와 약대의 비유가 그 이야기입니다.
하루살이나 약대나 다 먹으면 안 되는 부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살이를 걸러낼 때는 철저하게 걸러내는데 약대는 그냥 먹어치우더라는 것입니다.
사소한 일들은 잘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큰일이나 중요한 문제는 그냥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나는 청지기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쓰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런 중요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에만 철저하게 십일조를 바치고 큰일은 그냥 모른 체하고 넘어감으로 십일조의 바른 의미를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십일조를 바치면서 그런 근본적인 정신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형식적으로 드리고 아까운 마음으로 드리고 진짜 있어야 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거기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그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일에 또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사용하려는 마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약시대에 와서 하나님께서 헌금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크게 노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헌금이기 때문에 강요를 하고 벌칙을 가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헌금을 바치는 사람은 오히려 조심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 거짓된 마음이나 인색한 마음이나 원망이나 불평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 헌금을 많이 바치고도 벌을 받은 사람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그들에게 누가 재산을 팔아서 헌금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스스로 결정을 한 일입니다.
물론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서 교회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자기들도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바치면서 조금 덜 드렸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서 두부부가 다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나 헌금을 바칠 때 정말 조심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진정한 감사가 없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가난한 사람 취급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드리는 헌금에 나의 마음과 정성이 들어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 즉 구약성경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예표 된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잘못해석하고 잘못 지키고 있는 율법의 정신을 바로잡아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구약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율법들을 바른 정신으로 지킬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 마 5:17-18
제목 : 율법의 완성.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끔 갈등을 겪는 것 중에 하나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율법을 지켜야 하고 절기들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데 신약성경에 보면 제사제도나 절기들이 없어지고 율법을 행하는 것도 그렇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신약성경에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선택받은 선민이라고 했는데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 땅에서 잘 살고 장수하는 것이 복이라고 했는데 신약성경에서는 오히려 이 땅에서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우리의 복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운 로마서 10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끝내버리셨다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롬10:5)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인이 됐지만 이젠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그 행함이 따라야 된다고 하면서 율법의 행함을 구원받은 사람이 행하여야 하는 것으로 은근히 말함으로 행함이 구원받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는 행함이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행함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행하여야 할 의무라고 말합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은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구약성경과 신약성경과의 갈등관계를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들과 서신서들을 잘 살펴보시면 그들이 이 갈등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행적들이 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들이 구약성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그 해석이나 적용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즉 구약성경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경의 말씀을 완전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갈등을 해소하고 율법의 행함과 은혜의 선물인 믿음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1.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예수님
오늘 본문 말씀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율법이나 선지자’ 라고 하신 것은 구약성경을 일컬어 하시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모세오경을 가리키기도 하고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선지자’는 구약성경의 선지서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율법이나 선지자’라고 할 때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구약성경의 말씀들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하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완전케 하다'라는 단어는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면서 ‘완성하다’ ‘성취하다’ 라는 말로도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구약성경의 말씀을 완전하게 채우시기 위해서 또 그 예언들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숨은 그림 찾기나 퍼즐 맞추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내용 속에는 어떤 숨은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이나 교훈들 속에 그 사건이나 교훈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숨은 그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을 다 제대로 맞추어 보면 하나의 큰 그림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숨은 그림이 무엇이며 그 완성된 퍼즐의 그림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보는 것이 구약성경을 잘 보는 것입니다.
그 숨은 그림과 완성된 퍼즐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잘 아십니다.
그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성경이 오실 예수님에 관한 글이라고 하는데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그렇게 확실히 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줄은 알지만 확실히 그렇게 믿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구원에 관한 많은 기사들을 읽습니다.
노아홍수 때부터 살펴보면 세상 사람들이 다 홍수로 죽게 될 때 노아와 그 가족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불탈 때 거기 살던 사람들 중에 롯과 그 딸들만 구원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탈출시킵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고 요단강을 건너게 해서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유다가 망해서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 남은 자들 중에서 소수의 사람들을 귀국시킵니다.
수많은 전쟁 수많은 재난 수많은 병마와 고통 속에서 사람들을 구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구원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숨은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그런 구원들의 완성이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구약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한 핵심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많은 절기들과 의식들을 봅니다.
유월절이나 여러 감사절이나 속죄일이나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여러 종류의 제사들이 모두가 다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절기의 의미들이 그 제사에 쓰인 제물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활동한 위대한 인물들을 봅니다.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그렇게 유명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맺어주신 많은 언약들을 발견합니다.
노아에게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다윗에게 그 후손들을 통한 왕의의 보장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외에 수많은 크고 작은 언약들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언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구원의 사건들과 제도들과 언약들의 성취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구약성경을 부인하거나 없애기 위하심이 아니라 그 예언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 성취의 결과로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2.구약의 율법의 뜻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분이 아니시다. 천지가 없어진다고 해도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할 때 사람들은 봐라 율법은 지켜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은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오해한 것을 바르게 잡아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율법하면 생각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십일조 헌금을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가장 오해하기 쉬운 것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정말로 잘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일이었고 그래서 아주 세심하게 잘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않고 집에 있어야 되는데 그라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때 얼마만큼 움직일 수 있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정해놓고 행동을 했습니다.
만약에 안식일에 집에서 키우는 소나 나귀가 고삐를 풀고 도망을 나가면 잡으러 가야할 까요 그대로 두어야 할까요?
잡으러 가면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되고 그대로 두면 너무 아깝잖아요? 그래서 원칙을 정합니다.
소나 나귀가 도망을 가면 2천 야드(약 1800미터)까지는 달려가서 잡을 수 있고 그 이상 가면 안 된다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 근거는 도피성까지의 거리를 환산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고의가 아닌 과실로 살인을 했을 때 도피성으로 도망을 가면 그 안에서는 용서를 받고 죽임을 당하지 않는 제도가 도피성제도입니다.
그래서 짐승을 구하는 거리도 그 도피성거리인 2천 야드까지는 가능하다고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 대신에 주일을 지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날 모이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모이는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꼭 그렇게 하라는 말씀은 없는데도 우리는 주일을 안식일처럼 지킵니다.
우리 어렸을 때 주일을 안식일처럼 아주 엄격하게 지켜야 했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멀어도 차를 타지 못하고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주일날 무엇을 사다가 먹는 것은 죄라는 생각 때문에 하지 못했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봐야 하고 자격증 시험을 봐야 하는데 주일이기 때문에 시험을 보러가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가족은 물론이고 일하는 하인들과 짐승들까지도 아무 일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렇게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 차를 몰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운전기사들이 운전을 해야 차가 움직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 교회당도 지금 한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전기가 들어와서 불도 밝히고 음향기기도 사용하고 악기들도 사용을 합니다.
어차피 지키지 못하는 율법인데 사람들이 괜한 고생들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킨다고 할 때 율법을 받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과 어떤 목적으로 그런 율법을 주셨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수천 년에 걸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여자 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왜 제정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날을 지키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시면서 안식일을 제정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씀에서 그날을 기억하고 또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쉬는 것도 그 의미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날만이 하나님의 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사는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여섯 날들이 우리에게는 더욱 감사할 날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면서 이 우주 만물이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음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루를 안식하면서 우리도 하나님처럼 열심히 일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주일은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부활하신 주일날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날들입니다.
다만 오늘 하루는 더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어서 험한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준비를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주신 것처럼 이 거룩한 주일 주님 앞에 나와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들에게 크신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는 날 그 능력을 받는 날 그날이 안식일이요 주일인 것입니다.
십일조에 관한 율법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또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 먹고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정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그 십일조 헌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운영합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에 대해서 꾸짖으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도다.”(마 23:23-24). 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십일조도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여기 박하와 회향과 근채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향료나 양념으로 쓰이는 식물들입니다.
이 식물들은 아주 조금만 쓰는 것이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도 별로 돈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작은 것들을 드릴 때는 아주 철저하게 드립니다.
그런데 큰 것을 드릴 때는 대강 넘어가더라는 것입니다.
하루살이와 약대의 비유가 그 이야기입니다.
하루살이나 약대나 다 먹으면 안 되는 부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살이를 걸러낼 때는 철저하게 걸러내는데 약대는 그냥 먹어치우더라는 것입니다.
사소한 일들은 잘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큰일이나 중요한 문제는 그냥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나는 청지기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쓰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런 중요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에만 철저하게 십일조를 바치고 큰일은 그냥 모른 체하고 넘어감으로 십일조의 바른 의미를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십일조를 바치면서 그런 근본적인 정신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형식적으로 드리고 아까운 마음으로 드리고 진짜 있어야 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거기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그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일에 또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사용하려는 마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약시대에 와서 하나님께서 헌금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크게 노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헌금이기 때문에 강요를 하고 벌칙을 가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헌금을 바치는 사람은 오히려 조심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 거짓된 마음이나 인색한 마음이나 원망이나 불평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 헌금을 많이 바치고도 벌을 받은 사람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그들에게 누가 재산을 팔아서 헌금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스스로 결정을 한 일입니다.
물론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서 교회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자기들도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바치면서 조금 덜 드렸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서 두부부가 다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나 헌금을 바칠 때 정말 조심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진정한 감사가 없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가난한 사람 취급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드리는 헌금에 나의 마음과 정성이 들어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 즉 구약성경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예표 된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잘못해석하고 잘못 지키고 있는 율법의 정신을 바로잡아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구약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율법들을 바른 정신으로 지킬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